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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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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래향의 전설 리향란의 파란만장한 인생드라마
2014년 10월 26일 21시 17분  조회:7040  추천:1  작성자: 넉두리

야래향의 전설 리향란의 파란만장한 인생드라마

 
(번역)




 
 
리향란(李香兰)의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이다. 리향란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는 바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던 위만주국시기였다. 리향란은 조국인 일본과 고향인 중국사이에서 운명의 희롱을 받으면서 청춘세월을 고뇌속에서 보냈다.
야마구치 요시코의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한학(汉学)을 좋아했고 중국문화를 흠모했기때문에 1906년에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왔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1920년 2월 12일에 중국 료녕성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출생했다.
1932년에 야마구치 요시코의 아버지 야마구치 후미오(山口文雄)는 평정산(平顶山)사건에 련루되여 적과 내통했다는 죄명으로 구류되였다. 그후 야마구치 요시코일가는 심양으로 이사갔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13살때 아버지의 친구이며 심양은행총재인 친일파 리제춘을 알게 되여 그의 양딸로 되였다. 그때로부터 그녀는 양아버지의 성을 따라 리향란이란 듣기 좋은 중국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1934년 그녀는 반숙화(潘淑华)라는 이름으로 북평의 익교녀자중학교에 입학해 1937년에 그곳을 졸업했다.
동북을 침범하고 부의를 부축하여 위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가상을 보여주기 위해 1937년에 특별히 “만주영화촬영소”를 세웠다.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했기때문에 봉천방송국의 신만주가곡의 가수로 등용된 리향란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8년에는 만주국의 국책영화사, 만주영화진흥협회에서 중국인 전속녀배우 리향란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의 주제가도 큰 인기를 끌었기에 리향란은 가수 겸 영화배우로 일본과 만주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중국이름과 유창한 중국어로 인해 일본과 만주에서는 그녀를 중국인 명배우인줄로 여겼다. 그때 리향란은 저명한 간첩 김벽휘(가와시마 요시코)와도 친밀하게 지냈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영화에도 많이 출연한 리향란은 만주진흥협회의 전업녀배우로 출연해 인기를 모았다. 리향란은 만주철도회사에서 자금을 내여 세운 이 영화촬영소에서 초빙한 첫기의 전직배우였다. 1941년 2월 11일에 니혼극장에서 “노래하는 리향란”으로 출연했을 당시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많은 팬들이 몰려들어 니혼극장바깥에도 사람들로 둘러싸였기에 소방차가 출동해 물을 뿌려 군중을 해산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1943년에는 아편전쟁에서 활약한 중국의 영웅 림측서를 묘사한 장편력사영화인 《만세류방(万世流芳)》에 참가한 그녀는 림측서의 제자인 심달년의 련인으로 녀주역을 맡았다. 전중국에서 이 영화가 개봉되자 극중 그녀가 부른 주제가인 매당가(卖糖歌)와 계연가(戒烟歌)는 중국영화사상 가장 큰 인기를 끌어 리향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만세류방》으로 인기를 얻은 그녀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려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밝히지 못했다.
리향란이 주역을 맡은 첫부의 영화는 《밀월급행렬차(蜜月快车)》였다. 이 영화를 찍고 그녀는 “일본어를 아는 중국소녀배우”로 소문났다. 그후 그녀는 《지나의 밤(支那之夜)》, 《백란의 노래(白兰之歌)》 등 영화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되여 일본인을 꿈꾸는 중국인 녀성역을 맡았다. 이것은 그녀의 인기를 선전에 리용한 일본군부의 음모였다. 나중에 그녀는 “당시 나는 열몇살밖에 안된 소녀여서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역을 맡았다”고 말하면서 이 영화에 출연한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리향란은 일본 봉천방송국의 새 프로 “만주신가곡”에서 《어가녀(渔家女)》, 《소군원(昭君怨)》, 《맹강녀(孟姜女)》 등 중국가곡을 불렀다. 그녀는 《야래향(夜来香)》을 불러 명성을 크게 떨쳤다. 명가수 리향란은 이렇게 탄생되였다. 그녀는 명가수로부터 저명한 영화배우로 인기몰이를 하면서 연예계의 “슈퍼거성(超级巨星)”으로 높이 떠올랐다. 리향란은 크게 이름을 날린후에도 계속 일본군을 선전하거나 일본침략전쟁을 미화한 영화에서 주역을 맡았다.
나중에 리향란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전쟁년대에 생존을 위해 나는 결사적으로 성악과 연기를 배웠다”고 말했다. 그녀는 군국주의를 위해 선전하고 중국인을 멸시한 영화를 찍은것에 대해 매우 큰 자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리향란”이란 이름때문에 그녀를 중국인으로 오인했기에 일본군을 위해 영화를 찍는 그녀를 더욱 미워했다. 그녀는 중압에 견디지 못해 1944년에 “만주영화촬영소”에서 사직하고 상해에 거주했다.
1945년에 일본이 무조건 투항하고 위만주국이 멸망되자 전국에서 친일파 한간을 토벌하는 행동이 시작되였다. 국민당에게 매국노로 체포된 리향란은 군사법정에서 “한간죄”혐의로 심문을 받게 되였다. 그녀는 중국인으로 여겨져 상해경마장에서 총살될 운명이였다. 그러나 봉천시절의 친구가 야마구치가문의 일본호적을 제출하고 그녀가 일본인이라는것을 증명했기에 한간죄는 적용되지 않고 국외추방을 선고받았다. 재판당시 재판관은 그녀가 일본국적이라는것을 리유로 무죄를 선고했지만 그녀가 《지나의 밤》에 출연해 중국인을 일본인에게 굽실거리게 한 대목은 도의적으로 용서받을수 없는 죄라고 말했다. 그러자 요시코는 젊었을 적에 철이 없어 한짓이니 용서해달라고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1946년 2월 28일에 리향란은 평범한 가정주부차림으로 화장기없이 평복을 입고 귀국선에 올라탔지만 중국정부의 출국관리가 그녀를 알아보았기에 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하지만 10일후 오해가 풀려 3월에 다시 귀국선을 탄 리향란은 다시 투옥될가봐 선박화장실에 몸을 숨겼다. 그러다가 배가 항구를 출발하자 바깥으로 나왔는데 그때 라지오에서 그녀가 부른 “야래향(夜来香)”이 흘러나왔다.
일본으로 귀국한 리향란은 1947년에 본명인 야마구치 요시코로 일본영화계에서 활약했다. 주연작으론 1950년에 제작된 《황혼의 탈주》가 대표적이다.
1950년대에 그녀는 미국의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百老汇)에 들어가 선후로 적지 않은 무대극과 영화에 출연하여 거성이 의연히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시기에 뉴욕에서 일본계 미국인이며 저명한 조각가였던 이사무 노구찌(野口勇)와 결혼했지만 1955년에 리혼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향항에서 영화 《금병매(金甁梅)》, 《신비한 미인(神秘美人)》, 《하루밤 풍류(一夜風流)》에서 주연으로 연기한 그녀는 중국이름인 리향란으로 다시 부활했다. 그녀는 향항의 100대 명판공사에서 10곡의 영화주제가를 불러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1958년에 일본으로 돌아간 그녀는 외교관인 오타카 히로시(大鹰弘)와 재혼했다. 그후 남편의 성을 따라 “오타카 요시코(大鹰淑子)”라고 이름을 고쳤다. 후에 그녀는 연예계에서 은퇴하고 전문 남편을 내조하는 외교관의 부인으로 살았다. 오타카 히로시는 2001년 4월에 73세로 사망되였다.
1969년에 50세가 눈앞인 그녀는 오래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기자꿈을 실현하게 되였다. 텔레비죤방송국프로의 사회자로 된 그녀는 중동, 남아프리카 등지를 다니면서 아라파트, 만델라 등 풍운인물을 취재하기도 했다.
1974년에 당시의 수상이였던 다나까 가꾸에이(田中角荣)의 요청으로 자유민주당선거에 참가한 그녀는 처음으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였고 그후 1980년과 1986년에 재당선되였다. 그녀는 환경정치차관, 오끼나와 참의원 및 북방령토문제를 둘러 싼 특별위원회 고문직을 맡았다. 1992년에 정계에서 은퇴했는데 1993년 11월 3일에 2등보관훈장을 수여받았다. 퇴직후 그녀는 줄곧 “아시아녀성기금회” 부리사장직을 맡았다. 그녀는 이 직무를 리용하여 일본정부에 전쟁피해자 및 당년의 위안부들에게 사과하고 손해배상을 하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1990년대에 고래희의 나이로 일본우익세력의 압력을 무릅쓰고 북경대학, 남경대학 등 중국의 대학을 방문한 리향란은 “력사견증인”의 신분으로 광대한 학자들에게 “나는 ‘9.18사변’, ‘로구교사변을 겪었으며 ‘평정산사건’의 처참한 정경을 목격했습니다”고 말했다.
그녀는 《중국에서의 나날—리향란: 나의 전반생》이란 자서전을 써냈다. 연예계의 전설인 그녀는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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